국악방송 '구술프로젝트' 통해 진주삼천포농악 보유자 김선옥의 70년 풍물 인생 조명
□ 피란길 헛간에서 태어난 아이, 한국 농악의 명맥을 잇다
□ 사라진 '솟대쟁이패' 복원… 진주가 낳은 마지막 유랑광대의 삶과 예술

(진주삼천포농악 보유자 김선옥)
국악방송(사장 직무대행 김은하)은 우리 소리와 전통문화를 지켜온 명인·명창들의 삶을 기록하는 라디오 특집 '구술 프로젝트,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통해 국가무형유산 진주삼천포농악 보유자 김선옥 명인의 70년 풍물 인생을 집중 조명한다. 본 방송은 오는 8월 3일(월) 밤 9시 라디오, 8월 4일(화) 오전 9시 TV를 통해 각각 송출된다.
1950년 6월, 6·25전쟁 피란길 남의 집 헛간에서 태어난 아이는 다섯 살에 외할아버지의 어깨 위에서 무동을 타며 농악판에 발을 들였다. 그로부터 70년, 김선옥 명인은 현재 (사)국가무형유산 진주삼천포농악보존회장이자 세한대학교 전통연희학과 교수로서 109명의 보존회원과 함께 진주 풍물의 명맥을 굳건히 잇고 있다.
■ 피란길 헛간에서 유랑패의 어깨 위로… 70년 풍물 인생의 서막
외가에서 자란 그에게 최고의 놀잇감은 큰방 가득 쟁여져 있던 농악기였다. 서너 살 아이가 혼자 상모를 눌러쓰고 돌리는 모습을 눈여겨본 외할아버지 강두금(예명 강판새)은 네 살부터 손자를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다. 진주농악단을 이끈 상쇠이자 전국을 떠돌던 유랑예인집단 '솟대쟁이패'의 일원이었던 조부의 어깨 위에서 다섯 살 손자는 입장부터 인사굿까지 무동을 타며 첫 무대를 밟았다.
집안의 반대는 거셌다. 농악대회를 나서는 일곱 살 조카를 붙잡으러 기차까지 쫓아온 외삼촌을 피해 기차에서 내렸다 다시 올라탄 일화는 지금도 웃음 섞인 회고담으로 남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상모 하나만 챙겨든 채 전라도 정읍여성농악단으로 향했다. 당시 전라도에 없던 경상도식 소고 뒤집기를 선보인 세 소년은 일명 '날으는 삼총사'로 불렸다. 3년 뒤 귀향을 결심한 그는 새벽 3시 40분 고창을 빠져나와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며 밤 8시가 되서야 진주에 도착했다. 몇 해 만에 돌아온 손자를 무대에 세운 할아버지는 "우리 손자 뜬쇠(놀이에서 그 분야의 최고 우두머리) 되어서 왔다"며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녔다.
■ 1965년 우리나라 농악 최초의 무형문화재 지정
김선옥 명인이 열다섯이 되던 1965년, 진주공원에서 문화재관리국의 조사가 시작됐다. 우리나라 농악으로는 최초였다. 특정 지역명 대신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 농악 12차'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진주 농악이 곧 한국 농악을 대표한다는 뜻이었다. 이후 1985년 평택농악과 이리농악이 지정되는 것을 계기로 이보형·정병호 선생이 경남 일대를 답사하며 12차 농악의 뿌리가 진주 솟대쟁이임을 입증했고 이듬해 명칭은 지금의 ’진주농악‘으로 확정됐다. 소년 김선옥도 그 험난한 조사길을 함께했다.
그가 가장 자랑하는 대목은 단연 ‘벅구놀음’이다. 군사적 요소가 짙게 배어있는 진주 가락은 빠르고 힘차고 경쾌해 부드럽고 여성적인 다른 지역 농악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전국 농악대가 벙거지에 흰 꽃을 달 때, 장미처럼 붉은 꽃을 얹는 것 역시 진주만의 고유한 특징이다. 여덟 살에 대구 대회장에서 주최 측이 매표금을 들고 도주하는 바람에 악기를 여관에 잡힌 채 일주일간 지신밟기를 하며 밥값을 벌어야 했던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사설은 평생의 자산이 됐다. 훗날 이차생 선생에게 사설을 전수받아 혼자 산에 올라 미친 듯이 외운 덕에 진주와 삼천포의 지신밟기가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았다.
■ 사라진 '솟대쟁이패'의 부활
1936년 황해도 원산 공연을 끝으로 진주솟대쟁이패는 해체됐고, 여러 연희 종목 가운데 12차 농악만이 살아남았다. 그러다 2004년 제자들의 제안으로 복원에 착수한 그는 2009년 풍물인생 55주년 공연에서 처음 솟대를 올렸고, 2010년에는 진주에 남은 후예들의 증언과 심우성 선생의 고증을 거쳐 의상까지 되살렸다. 어린 시절 약장사를 따라다니며 문현재 선생에게 어깨너머로 배운 마술 '얼른'은, 훗날 선생이 솟대쟁이에서 '얼른'을 맡았다는 증언이 나오며 확신으로 굳어졌다. 2014년 진주성 국립진주박물관 앞 복원 공연에서 선보인 '얼른'은 전국에서 모여든 학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 명예 대신 고향을 택한 45년… 아내의 희생이 지켜낸 세계의 유산
사물놀이 열풍이 전국을 강타하던 1980년대, 이생강 선생이 상경을 권유했다. "이리 와라. 멤버만 제대로 맞추면 (김)덕수 잡을 팀은 너밖에 없다" 달콤한 제안이었지만 그는 가지 않았다. "제가 그때 갔으면 진주삼천포농악은 역사 속으로 영영 사라졌죠" 김선옥 명인의 선택 뒤에는 아내의 헌신이 뒤따랐다. 의상실에서 양품점으로, 다시 식당으로 쉼없이 업종을 바꿔가며 생계를 책임진 것은 온전히 아내의 몫이었다. "결혼해서 2000년까지, 제가 돈을 벌어서 생활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섯 살에 시작한 그가 보유자로 인정받은 것은 2000년, 장장 45년 만이었다.
2014년 농악이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던 날 그는 파리 현장에서 그 감격을 온몸으로 맞이했다. 이후 진주시 37개 읍·면·동이 빠짐없이 참가하는 읍면동 농악경연대회를 만들어 농악을 시민의 품으로 돌려보냈다. 이 대회는 훗날 진주시가 유네스코 창의도시로 지정되는 데 큰 몫을 했다. 김선옥 명인이 제자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은 한결같다. "무대에 올라가면 내가 최고라는 자부심으로 하되, 무대에서 내려오면 겸손해야 한다"
"내가 왜 이 고된 길을 왔는가 후회도 많이 했다"는 그는, 이내 "지금 보면 참 인생을 잘 살아왔다"고 말한다. 6·25전쟁 피란길 헛간에서 시작해 파리의 유네스코 회의장까지 이어진 김선옥 명인의 70년은 유랑광대의 시대가 저문 자리에서 우리 농악이 어떻게 살아남아 인류의 유산이 되었는지를 증언하는 살아있는 사료(史料)다.
한편 국악방송 라디오는 서울·경기 FM 99.1MHz를 비롯해 광주, 대전, 대구, 부산, 전주 등 전국에서 청취할 수 있다. TV 채널은 KT지니TV 251번, SK브로드밴드 Btv 268번, LG유플러스 189번, LG헬로비전 174번 등 지역별 채널에서 시청 가능하다.